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동원/선수 경력 (문단 편집) == 실업 시절 == 연세대 경영학과 77학번 를 졸업하고 당시 최고 수준인 3,000만 원[* 최동원의 인터뷰에서는 5,000만원이었는데 2,100만원은 현금지급이었고, 2,900만원은 6개월 어음이었다고한다. 최동원은 이 말도 안 되는 계약을 믿었으나, 롯데는 그 어음을 그가 사망할 때까지 결제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최동원은 프로구단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면서 "다시는 속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그와 롯데와의 인연은 시작부터 악연이었다.]의 계약금을 받고 1981년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트]]에 입단했다. 그때부터 롯데 자이언트의 에이스가 되었다. 1981년 롯데 자이언트가 소화한 팀 이닝이 36경기 324이닝이었는데 그 중 206이닝을 신인이었던 최동원이 소화, 17승 4패를 기록하며 팀을 [[코리안시리즈(실업야구)|코리안시리즈]][* 한국시리즈의 실업야구 버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팀을 위해 코리아 시리즈에서 불태웠다. [[1981년 코리안시리즈|81년 실업야구 코리아시리즈 6차전]]까지 전부 등판 1차전 9이닝 3실점 완투 敗 2차전 7이닝 무실점 (2회부터 구원 등판) 敗[* 이미 1회에 롯데가 5실점한 상황이라 패전이 아님] 3차전 7이닝 3실점 (5회부터 구원 등판) 무 4차전 7⅓이닝 3실점(희대의 기록인 1경기 1승 1세이브를 기록) 勝[* 현대 야구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기록인데 과거의 야구 룰 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기록이다. 투수를 교체할 때 아예 빼지 않고 야수 자리에 넣었다가 다시 투수로 기용할 경우 이런 기록을 세울 수 있다. 주로 고교야구 등 아마추어 야구에서나 볼 수 있는 상황이며 프로야구에서는 10년에 한 번 볼까 말까한 빈도로 이런 광경이 벌어진다. [[김성근]] 감독이 SK 감독 재임 시절 이런 식으로 경기를 치른 적이 있다.] 5차전 3이닝 무실점(7회 구원 등판) 勝 6차전 9이닝 4실점 완투. 勝 '''코리아시리즈 6경기중 6경기 등판 42⅓이닝 2승 1패 1세이브. 방어율 2.45''' || [[파일:attachment/1981koreaseiresplayers11.png|width=100%]] || 김시진, 장효조 등이 포진되어있던 육군 경리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롯데가 실업야구 마지막 코리아시리즈에서 우승을 하는데 일조했다. 특이사항으로 4차전때 7회까지 선발로 던지다가 휴식을 주기위해 8회초 1루수로 보직을 변경했고, 8회말 2사 만루상황에서 구원등판해서 깔끔하게 막아 1경기 1승 1세이브를 기록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도 연출한다.[* 참고로 현재 야구 규칙으로는 한 투수가 동일한 경기에 승리와 세이브를 동시에 채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KBO 규칙 10.20조에는 세이브 투수의 요건으로 '승리 기록을 얻지 못한 투수'라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투수는 승리 혹은 세이브 두 기록 중 하나만 가질 수 있다.] 롯데의 우승과 더불어 최동원은 실업야구 최우수선수, 다승왕(17승), 신인투수상을 수상하며 3관왕을 차지했다. 1981년 시즌이 끝나고 실업팀이던 [[한국전력공사]]에 이적하여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이유는 [[야구 월드컵|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1982년|1982년에 있었는데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소속 팀이었던 롯데는 프로로 전환하였기에 아마추어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던 것. 그래서 한창 날아다니는 선수들을 실업팀에 임시로 입단을 시켰다. [[임호균]], [[심재원(야구선수)|심재원]], [[이해창(1953)|이해창]], [[김재박]], [[장효조]] 등이 한국프로야구 원년에 데뷔를 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세계선수권대회가 종료된 후, 다시 최동원은 (프로로 전환한) 롯데에 입단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